1948년 제주를 위한 축문…영화 <지슬> by 고민인김씨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은 느닷없이 시작되는 영화다. 느릿느릿 한라산의 풍경을 담아내던 카메라가 어느 샌가 그야말로 ‘좁아터진’ 구덩이 속으로 들어오고 나면, 제주의 순박한 민중이 하나둘씩 구덩이로 뛰어든다. 구덩이에 옹기종기 끼어 앉은 대여섯 명의 사람들은 저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 사투리를 사정없이 내뿜으며 대화를 나눈다.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머리 위로는 물음표가 가득하다. 어째서 아랫마을 사람들이 군인들의 총에 몰살당했는지, 어째서 자신들이 산속으로 도망쳐 좁은 구덩이 속에 숨어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품속에 넣어온 방에 적혀있는 ‘소개령’의 뜻은 도대체 무엇인지, 어째서 해안가로부터 5km를 벗어나면 무조건 총을 맞게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제주 4·3항쟁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관객들은 저들이 지독히도 비참한 상황 속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구덩이에 푹 박혀 숨어있는 저들과, 제주 4·3항쟁의 역사를 모르는 관객들은 그저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도대체 왜 국군이 악마처럼 변해 총칼을 들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는가.


‘4·3특별법’에 명시된 제주 4·3항쟁, 또는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을 말한다.


4·3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1947년 3월1일 제주읍 관덕정 마을에서 3·1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한 시위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쏴 6명의 희생자를 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제주에서는 남로당이 투쟁위원회를 만들어 경찰에 저항했으며, 이듬해 미군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이뤄진다는 소식에 이 저항은 반미운동으로까지 발전한다. 경찰서와 우익단체 등에 대한 공격이 잇따르자, 결국 미군정은 제주도민에 대한 ‘토벌작전’에 나선다. 


2003년 채택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진상보고서는 4·3항쟁을 통한 인명피해를 2만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했다.


영화는 제주의 산과 마을을 번갈아 비추며 도망친 마을사람들과 화가 난 군인들을 살핀다. 마을사람들은 꼬질꼬질한 누더기 옷으로 몸을 칭칭 동여매고 피난길에 올랐고, 군인들은 ‘빨갱이’를 찾아내려 혈안이 돼 있다. 결국 널찍한 동굴에 숨을 곳을 마련한 섬사람들은 “이틀 뒤면 다시 마을로 내려갈 수 있을 거야”라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마을은 이미 군인들에 의해 불타고 있다.


영화는 흐르면서 섬사람들이 칭칭 동여맸던 옷가지에 피를 흠뻑 묻힌다. 동굴을 이탈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군인들에게 붙잡혀가거나 총에 맞아 죽는다. 미처 동굴로 숨지 못했던 사람들도 마을을 습격한 군인들에게 칼을 맞거나 불에 타 죽는다. 그들은 피가 철철 흐르는 몸을 바라보며 “도대체 빨갱이가 뭐기에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정작 군인들은 “빨갱이 손에 우리 어마이가 죽었소”라는 답을 할 뿐이다.

군인들은 점점 미쳐간다. 아직 ‘빨갱이’를 한 마리도 사살하지 못한 신병은 “저들이 과연 폭도가 맞는가”라는 인간적인 의문을 아직까지 품고 있지만, 제주에 오래 남아 처치한 ‘빨갱이’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 의문은 지워진다. 결국 눈이 뒤집혀 사람들의 복부에 칼을 찔러 넣는 군인과, 마을 어귀에서 붙잡은 처녀를 능욕하는 군인만이 남는다. 오멸 감독은 가장 계급이 높은 군인을 모르핀에 중독된 광인으로 그렸다. 노골적이며 직설적이다.


결국 동굴은 탄로 났다. 어리석은 밀고자 한 명 때문에 동굴이 탄로가 났지만, 어쨌든 결국엔 들키게 될 동굴이었다. 군인들은 떼거지로 몰려와 동굴을 둘러싼다. 사람들은 이를 먼저 눈치 채고 동굴 안에서 마른 고추를 태워 매운 연기를 만들어낸다. 군인들은 맵디매운 그 연기를 뚫고 들어가 총질을 해댄다.


그 동굴에 마른 고추가 있었다니. 어쩌면 감독은, 그러한 개연성의 오류를 감당하면서까지 고추를 태우려 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감독은, 마른 고추로 매운 연기를 만들어내 군인들에게도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섬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이면서, 분명 괴로워하는 군인들은 있었지만, 그 중에서 눈물을 흘렸던 군인은 없었다. 총에 맞고 칼에 찔려서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제주도민들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군인들이 너무도 괘씸해 고추를 태웠다. 군인들은 그제서야 눈물을 쏟았다.


눈물 범벅이 된 군인들이 물러나고, 생존한 마을사람들마저 동굴을 빠져나갔을 무렵, 동굴에서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위틈에 끼어 죽은 임산부가 숨을 놓기 직전 아이를 낳았다. 관객들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고 있는 시점에서, 감독은 동굴 입구로 종이 한 장을 슬며시 떨어뜨린다.


새하얀 문종이 쓰인 신위(神位). 꽁무니부터 불이 타오른다. 축문을 읊는 듯한 음악이 관객의 귓전에 맴도는 사이, 섬사람들과 군인들의 숨이 끊어졌던 자리에서 지방은 저마다 타오른다. 영혼이 머물렀던 자리는 그렇게 타올라 위안받는다. 누군가 말했듯 이 영화는 카메라로 해낼 수 있는 최상의 씻김굿이며, 동시에 축문이다. 오멸 감독의 본래 목적이 4·3을 대중에게 알리고, 4·3의 전개를 그리고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신위가 타오르는 장면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엔딩 크래딧이 오르고, 관객들은 극장을 빠져나오며 경준과 만철, 상표와 무동, 순덕과 정길을 한명 한명 떠올린다. 108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속에 차마 담지 못할 그들의 심정과 사연을 저마다의 관점으로 재생시킨다. 마지막으로, 오멸 감독이 그린 동굴이 ‘큰넓궤동굴’이라는 이름으로 정말 존재했었고, 그 안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말 숨어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고 만다. 결국 우리도 마음속에서 문종이 한 장을 사른다.


덧글

  • 뭉게구름 2013/03/20 17:18 #

    새로운사실을알게되었네요.. 꼭봐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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