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스크린을 가득 메우던 그들의 얼굴 by 고민인김씨

감독이 배우의 얼굴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 스크린을 가득 메우도록 하는 것은, 관객이 그 인물을 알아봐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레미제라블>은 한 인물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혹은 눈물을 흘리며 노래 부르는 장면을 여러 번 밀착해 내보낸다. 그럴 때마다 카메라는 한 번의 끊임도 없이 인물의 바로 곁에서 노래를 듣는다. 롱-테이크.


장발장은 은촛대 2개를 더 베푸는 신부의 은혜에, 자신의 삶을 바꾸며 노래한다. 카메라는 그 때 처음으로 장발장에게 바짝 다가선다. “그의 말 한마디면 나는 다시 끌려갔을 텐데, 왜 그는 나를 용서해주었을까?” 장발장은 선(善)의 정점에 서 있는 자에게서 처음으로 배운 ‘용서’를 노래한다. 이 세상이 악(惡)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던 장발장에게 그것은 충격이었다.


이어지는 얼굴은 팡틴의 얼굴. 앤 헤서웨이라는 미모의 여배우를 그토록이나 추하게 만들어놓고도 감독은 가혹하리만치 가까이서 오래도록 그녀의 노래를 듣는다. 행복한 누군가가 쓸 가발을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고, 행복한 누군가가 낄 틀니를 위해 자신의 치아를 판 팡틴은 낯선 군인에게 처음으로 더럽혀지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노래를 부른다. 운명에 대한 원망과 절규로 비명을 지르던 노래.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번갈아 기웃거리던 카메라는 이제 자베르의 곁으로 밀착한다. 수십 년을 도망 다니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긴 장발장이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소”라고 짧게 말하며 자베르를 용서한 뒤였다. 충격에 빠진 자베르는 그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부의 용서에 자신의 모든 신념을 뒤엎은 장발장과는 달리, 자베르는 자신의 신념을 뒤엎을 수 없었다. 자베르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다리 위에서 몸을 던졌다.


고전은 언제나 그렇듯 영웅과 악인을 등장시키고, 고전을 해석하는 이들은 언제나 쉬이 선과 악의 대립에 주목한다. 그러나 영화 <레미제라블>은 그렇게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인물의 얼굴이 스크린에 오롯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카메라가 극도의 밀착을 보여주었듯, 영화도 인물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자베르는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는 식의 역할론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간편하게 획득하는 방법인 선악 대결을 포기하면서까지, 감독은 인문학적 관점을 놓치지 않았다. 분노, 용서, 사랑, 집착, 흥분, 절망, 탐욕, 질투, 공포, 고독을 아우르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모두 담아내려던 노력.


나는 만약 이 영화가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흘러가는 영화가 아니었다면, 3시간이 채 못 되는 짧은 러닝타임에 이렇게나 많은 감정을 모두 실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음악은 인간이 드러내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도구이고, 그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다. 팡틴이 그 슬픔을 노래하는 5분여의 시간, 그 때 그녀가 노래를 하지 않고 독백을 했다면 우리는 눈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덧붙여, 나는 다시 한 번 고전을 비롯한 옛 예술작품들을 놓치고 사는 것이 죄(罪)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이 한 번의 삶에 대해서는 말이다. 빅토르 위고가 머릿속에서 그려낸 이 놀라운 이야기를 포함해서,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예술과 업적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 자신의 삶에 커다란 가치를 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과 예술은, 영화에서 거리를 가로막은 바리케이드처럼, 인간 존재를 지키기 위한 방어벽인 동시에 인간 사회를 바꾸기 위한 전초기지다. 비록 그것이 총칼과 무관심에 피범벅이 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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