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은 다 타버렸고, 그 남자가 없다고 말한 것은 아직도 없다, 영화 <가변차선> by 고민인김씨

 양윤호 감독의 1992년작 <가변차선>은 막노동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그려낸 단편영화다. 25분간 스크린을 흐르는 영화의 내러티브는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영화에 등장하는 몇 가지 설정과 소품들, 예를 들어 병만(박신양)이 항상 품고 다니는 성냥과, 병만과 함께 일하게 되는 남자(진남수)의 절뚝이는 다리 등에서 나름의 메시지를 짚어낼 수 있다. 수척한 몰골로 돈벌이를 위해 위험천만한 도로 한복판 가변차선 위에서 일을 하는 설정은 물론, 가변차선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의미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한 설정들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나머지 설정들에 비해 좀 더 부각되고, 좀 더 이야기되기에 영화상에서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영화에 대한 글은 영화에 대한 자신의 욕망 속에서만 이해되어야 하며, 영화 평론은 영화와 내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본 나와 영화를 쓰는 내가 대면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말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들이나 설정, 그리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하여 흐르는 이야기에 ‘단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관객이 병만의 성냥을 두고 ‘비도덕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도 끝끝내 지켜가는 이타적 마음’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성냥이 병만과 남자의 동성애적 성적 긴장감을 상징하는 소품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고, 절뚝이는 남자의 다리를 두고 해체되어버린 미-소 양국 간의 냉전 체제를 상징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왜 성냥이 병만과 남자의 성적 긴장감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논거가 없거나 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것으로는 내가 나를 설득할 수 없다. 영화를 본 내가 영화를 쓰는 나를 설득할 수 없고, 영화를 쓴 내가 영화를 보는 나를 설득할 수 없다. 우리는 어째서 그것이 그것을 상징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영화 평론이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최대한 정확히 읽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일련의 작업이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빠르게 나열되는 산업화와 근대화의 산물들이다. 그것은 현란하고 화려하나 동시에 음습하고 퇴폐적이다. 수많은 쇼트들이 무심하게 나열되지만 검은 밤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붉은 십자가들과 숨 막히게 흘러가는 자동차들의 행렬, 성적인 단어들로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시뻘겋게 돌아가는 사이렌 불빛들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이게 너희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 ‘꼬라지’다”라고 폭로하는 듯 비춰진다. 요컨대, 영화는 시작부터 찡그리고 들어간다.

 어두컴컴한 새벽녘의 공사판에서 절뚝이며 서성이는 남자의 기침소리로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줄거리는 복잡하지 않다. 다리를 저는 남자와 어쩐지 순진해 보이는 남자가 우여곡절 끝에 가변차선을 닦아내는 일을 구하게 되고, 그 위험천만한 곳에서 둘은 일시적으로 갈등을 겪는데, 갑자기 병만이 남자와의 대화를 통해 절망감을 느끼고 자살한다는 내용이 <가변차선>의 줄거리다.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감독의 의도를 읊어낼 수 있다. 도시빈민의 비참한 일상과 워킹푸어의 부조리한 현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문학적 폭로.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가끔씩 당혹감을 느낀다. 단편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감독이 주제의식을 짧은 러닝타임 속에 녹이려다 보니, 왠지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띄는 까닭이다. 그 자연스럽지 못하고 턱턱 걸리는 부분들은 바로 ‘지나치게 돌출되고 노출되어 있는 상징들’이다. 

 <가변차선>에는 다수의 상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상징들을 미장센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고,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서도 찾아낼 수 있다. 상징으로 짐작되는 것은 많다. 가변차선, 성냥, 얼굴의 상처, 진흙바닥을 천천히 뚫고 들어가는 시추기, 안전모, 남자가 흥얼거리는 노래…. 그 중에서도 가변차선과 성냥은 감독이 중점적으로 주제의식을 녹인 상징들이다. 
  가변차선은 위험하다. 가변차선을 따라 걷는 그들의 양 옆은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다닌다. 그들은 몇 번이고 차에 치일 뻔 하면서도 안전한 곳으로 피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들을 장면의 가운데에 둔 채 양옆으로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미장센을 취하고, “도로에도 가변차선이라는 게 있는데, 왜 우리한테는 없는 거죠?”라는 병만의 대사를 넣음으로써 가변차선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관객은 이를 통해 왜 이 영화의 제목이 <가변차선>인지를 깨닫게 된다. 

 병만이 들고 다니는 성냥은 조금 더 상징적이고 돌출적이다. 심지어는 연극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병만은 “담배도 안 피는 사람이 어째서 성냥갑을 항상 들고 다니느냐”는 남자의 물음에 “불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거니까요”라고 대답한다. 여기까지는 성냥이 그저 하나의 맥거핀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서, 눈의 초점을 잃은 병만이 성냥갑에 불을 붙여버리고 자살하는 씬을 통해 성냥은 영화를 읽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상징이 되어버린다. 비흡연자가 커다란 팔각성냥갑을 품속에서 꺼낸다거나, 자살 직전 성냥갑에 불을 붙이며 그 위에 안전모를 던져놓는 의미심장한 행동들은 자칫하면 영화의 핍진성을 하락시키고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기능할 수 있다. 대중적인 상업영화에서 과연 이런 장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부러 성냥을 부각시킨다.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감독은 그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성냥을 통해 ‘타인에 대한 연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변차선이 이 시대의 잔혹한 현실이라면, 성냥은 감독이 꼭 지켜내고 싶은 시대정신의 핵심이다. 

 영화를 본 나와 영화를 쓰는 나는 이렇게 대면하고 합의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변차선>은 더 나아가게 하는 영화다. 즉, <가변차선>은 영화를 쓴 나와 현실을 사는 나를 또다시 대면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병만은 남자에게 묻는다. “인생을 다르게 살아볼 가능성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남자는 대답한다. “내가 가르쳐 줄게. (…) 없어!”
  1992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 속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가난한 자는 도로 위의 가변차선처럼 방향을 바꿀 방법도 없이 그냥 순종하며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급격한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인간시장의 밑바닥 인생들은 희망조차 품지 못한 채 가난을, 별을, 굴레를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의 그늘에서 벗어나 21세기에 들어선지 어느덧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아직도 방법이 없는가?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이 시대에 가변차선과 같은 희망이 넘쳐난다고 선언하고 싶다. 이 세상 모두가 노력만 하면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소리 높여 선언하고 싶다. 하지만 <가변차선>의 뒤를 잇는 영화들은 아직도 ‘양산’되고 있다. 우리는 <파주>를 보았고, <1번가의 기적>을 보았고, <나무 없는 산>을 보았고, <특별시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매일같이 뉴스를 본다. 그럴수록 점점 나의 논거는 사라진다. 선언도 그렇게 설득력을 잃어간다. 남자가 없다고 이야기한 것은 아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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